-
장려상
할머니와의 인연
작. 김성준
“동네에도 표정이란 게 있다면 수정동은 사람의 얼굴을 한 동네였다. 그 동네는 유서 깊지도, 대단한 보물을 가지지도
않았다. 으리으리한 관청도, 담장 높은 부잣집도 없다. 역사의 한복판에 있어본 적도 없는 평범한 동네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네 서민들이 사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어떤 대단한 동네보다 수정동과 내가 살던 그 골목길을
애틋하게 생각한다. 내가 인생의 보릿고개를 넘겨야 할 때 양식 서 말을 조건 없이 내어주신 분이 사시는 동네이기에 그렇다.”
“방 있읍니다”
수정동의 정겨운 그 골목길. 그 길의 낡은 전봇대에 붙은 낡은 광고지에는 맞춤법이 틀려 있었다. 찾아간 2층 주택엔 노부부 내외분이 살고 계셨다. 보증금 100에 월세 20. 전기계량기가 주인집이랑 연결돼 있기에 전기세는 월세에 포함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난 방세 안 올려.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방세 안 올려.”
인자하게 보이는 할머니는 계약서를 작성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그때만 해도 저 말씀을 실감하지 않았다. 앞으로 한 2년쯤 살겠지 싶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몇 해가 될 줄이야. 정말 할머니는 방세를 단 한 번도 올리지 않으셨다.
그 몇 년 동안 궂은 일, 좋은 일, 슬픈 일, 기쁜 일 다 겪었다. 자격증 시험 보러 나서야 하는데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옥탑방 출입문이 막혀 주인 할머니한테 도와달라고 소리 지르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할머니가 밖에서 눈을 치워주신 덕에 간신히 나올 수는 있었지만 급하게 철제 계단을 내려가다가 미끄러져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야 했다. 그날 나는 자격증 대신 두툼한 깁스를 얻었고, 그 탓에 직장도 한동안 쉬어야 했다. 생활비가 줄어들었으니 보일러 가동을 대폭 줄여야 했는데, 하루는 할머니가 내 방문을 톡톡 두드리셨다.
“이번 달 가스비는 내가 내줄 테니까 그냥 써. 아무리 남자라지만 이 추위에 가스 안 돌리고 어떻게 살려고 그래.”
어린 시절 읽었던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보면 천사는 거의 추운 겨울에 나타났다. 보일러 못 돌리는 걸 마음 아파하신 할머니의 따뜻함은 톨스토이 단편에 나오던 천사보다 더 환하고 따뜻했다. 엄동설한을 녹이는 건 보일러지만 보일러가 멈췄을 때 나는 보일러보다 더 따뜻한 사람의 체온을 느꼈다.
할머니는 귀가 어두우셨다. 하지만 텃밭 때문에 옥상에 왔다 갔다 하시면서 내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를 유심히 들으셨던 것이고, 그것이 멈추었을 때 아름다운 손으로 내 방문을 두드리셨던 것이다.
수상작 전문은 《이야기 공작소 부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