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동

나의 이름은, 부산진성공원

범일역에서 도보 7분 거리에 있는
부산진성공원.

아직은 자성대공원으로 더 익숙할 이 공원은

2021년 7월

일본식 명칭이었던 ‘자성대’ 라는 이름을 버리고

'부산진성'

이라는 진짜 이름을 되찾았다.

부산진성과 자성대에 얽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4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1만 8700명이 부산포에 상륙한다.

왜적은 부산진성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공격했다.

이에 맞서,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부산진성을 지킨 장군이 있었으니,

“성안에서는 두 번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으며 양측은 모두 전력을 다해 싸웠다. 훌륭한 장수이자 임금에 대해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조선군 거의 모두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고, 오직 소수만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

루이스 프로이스 지음, 정성화 번역, 『임진난의 기록』, 살림출판사, 2008.

바로,

정발 장군 이었다.

정발 장군은 전투가 치열했던 부산진성 서문에서
결국 전사했고,

부산진성은 왜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허물어버린 후,
약 700m 떨어진 높은 곳에 왜성* 을 쌓기 시작한다.
*왜성 :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일본식으로 쌓은 성

지금의 증산공원에 가면 볼 수 있는
증산 왜성이 바로 그것이다.

증산 왜성을 쌓는 데 이용된 바위와 돌은
허물어버린 부산진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만 명이 5개월 동안 쌓았다고 한다.

성이미지 증산 왜성

일본군은 이 증산 왜성에서 직선거리 약 1km 자리,
오늘날 부산진성공원 자리에 또 성을 쌓아 올리는데

바로,

자성대 왜성

이었다.

부산진성공원의 숲속 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비스듬한 성벽이 바로 이때 쌓은 왜성이다.

임진왜란 당시는 매축* 공사 전이었으므로
자성대 왜성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 매축: 바닷가나 강을 메워서 뭍으로 만드는 일.
일제강점기에 동구 수정동, 범일동 일대와 중구 중앙동 일부, 남구 우암동 일부에 이르는 해안을 매립해 뭍으로 만들었다.
부산진성공원 근처 성남초등학교와 좌천역 주변은 바다였다.

왜군은 자성대 왜성에 배를 정박해
일본에서 싣고 온 보급물자를 날랐던 것으로 보인다.

증산 왜성에 딸린 성이었지만, 자성대 왜성의 역할은 아주 중요했던 것이다.

약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왜군은 물러갔지만 전쟁 후의 조선은 극도로 황폐했다.

허물어진 부산진성을 새로 쌓을 여력이 없었던 조선은
자성대 왜성을 일부 고쳐서 부산진성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동서남북에 웅장한 문을 만들었고, 성안에 각 기관이 들어섰다.

자성대 부산진성
1910년경 부산진성과 객사 [출처 부산동구청]
하 지 만

그렇게 조선 후기 내내 이곳이 부산진성으로 사용되었음에도

‘자성대’라는 이름은 끝끝내 소멸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무려 400년이 넘도록...

이에 동구 주민들은 ‘자성대’라는 일본식 명칭을 버리고,
‘자성대공원’을 ‘부산진성공원’으로 변경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마.침.내

주민들의 노력으로 '자성대'는 '부산진성'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부산진성공원은 더 떳떳하게 나들이객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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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도심 한복판 역사의 현장 –임진왜란과 부산진성」(조봉권, 『이야기 공작소 부산』)​
「그날 부산진성 전투」(김민수, 『이야기 공작소 부산』)
편집.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참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www.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