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 섣불리 반박하는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암껏도 모르는 것들이 뭔 헛소리여!”
하는 꾸지람을 들을 것 같아 참았지만,
옮겨졌냐고?
초량 왜관* 으로 옮겨졌다!
*초량 왜관이 있던 곳은 오늘날의 초량동이 아닌
중구 일대였다.
할머니께 섣불리 반박하는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암껏도 모르는 것들이 뭔 헛소리여!”
하는 꾸지람을 들을 것 같아 참았지만,
사실 고관입구의 고관은 그 고관이 아니다.
수정동 '고관입구' 라는 명칭은
왜관과 관련이 있다.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진행된 곳을 말한다.
일본인들이 머물 공간과 일본 사절을 대접하고 잔치를 베푸는 ‘연향청’이 마련되어 있었던,
조선에 형성된 일본인 커뮤니티 같은 거였달까.
오늘날의 수정동에는 왜관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름하여
1607년, 약 1만 평 정도의 부지에 조성된 두모포 왜관은 동쪽은 바다를 향하고, 남·서·북 세 방향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다를 향한 동쪽에 한 개의 문이 나 있었고,
담장 밖에는 조선 군인 초소가 있어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 시절 왜관 주변 수정동 해안가*에는 일본인 배가 정박하는 선창이 있었고, 해안에서 육지로 올라가면 완만한 구릉이 펼쳐졌다.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시장이 왜관 밖 좌자천 주변에서 매일 아침 열렸으며, 두모포 왜관 뒷산에는 왜관에서 죽은 일본인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70여 년간 수정동에서 자리를 지켰던 왜관은 결국 옮겨져
옛 왜관, 즉 ‘고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초량 왜관* 으로 옮겨졌다!
*초량 왜관이 있던 곳은 오늘날의 초량동이 아닌
중구 일대였다.
사실 두모포 왜관이 세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왜관 측은
공간이 좁고, 건물이 부족하며, 선창이 불편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때마다 조선에서는 그들의 불만을 해결해 주려 노력했지만,
왜관 측은 끝내 왜관을 옮겨 달라는 요구를 해온다.
그 요구는 무려 30여 년간 계속됐다.
조선 입장에서는 왜관을 옮기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으므로
최대한 수리를 해서 계속 사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1671년 효고노스케 사망 사건으로 인해 변화를 겪게 된다.
왜관을 옮겨 달라고 수행원 200명을 이끌고 동래부 관아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효고노스케가 갑작스레 병으로 죽어버리자
왜관 이전 문제가 어쩐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678년 초량 왜관 시대가 펼쳐지며,
두모포 왜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이곳은 옛 왜관이 있던 곳,
‘고관’으로 불리게 됐다.